오늘날 우리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의료 환경 속에 살고 있다. 건강검진, 첨단 장비, 정밀 의학, 수많은 전문 클리닉과 병원… 이 모든 것이 넘쳐나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의사 부족’이라는 말이 동시에 들려온다. 이 모순적인 현실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 자원의 분포와 구조,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그리고 정책적 관점의 오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다. 도시는 병원으로 넘쳐나고, 대형 병원엔 환자들이 넘치는데, 지방이나 군 단위엔 감기조차 제대로 진료받기 힘든 ‘의료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즉, 의료는 넘치는데, 정작 필요한 곳에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의료 불균형’이라는 현대사회의 딜레마다.
흔히 사람들은 “의사가 많은데 왜 부족하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의사 수’가 아니라 ‘의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며, 어떤 질환을 다루는가’다. 서울 강남구엔 1차 병원부터 초고도 전문병원까지 밀집해 있지만, 강원도 시골엔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 하나 없을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의료 인력의 지역적, 전공 분야별, 치료 단계별 불균형에 있다. 이는 단순히 ‘의사를 더 뽑자’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 전체 의사 수는 OECD 평균보다 낮다. 2023년 기준,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는 한국이 약 2.6명, OECD 평균은 3.7명이다. 하지만 이 수치만으로 모든 문제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가장 큰 이슈는 의사들이 특정 과목에 편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등 비교적 안정적인 진료과에 몰리는 반면, 필수 의료라고 불리는 소아청소년과, 외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등은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 분야는 상대적으로 책임이 크고, 의료사고 위험이 높으며, 수익 구조도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결국 이 구조를 만든 건 시스템”이라는 지적이 많다. 외과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수술을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상이 적고, 의료사고 발생 시 법적 위험도 더 크다. 반면 피부과나 미용의료 분야는 안정적이고, 환자와의 갈등도 적다. 이처럼 수익성과 위험도가 불균형한 구조 속에서, 젊은 의사들은 합리적으로 ‘덜 힘든’ 과를 선택한다. 결국 특정 분야에선 의사 과잉, 다른 분야에선 의사 기근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의료 불균형은 전문 과목뿐 아니라 지역 간 편차에서도 극심하게 나타난다. 수도권은 병원도 많고 의사도 많지만, 지방의료는 아예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방 산부인과 폐업 사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병원이 없어져, 임산부들이 출산을 위해 몇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출산 난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응급 수술이 필요한 산모가 병원을 찾아다니다 사망한 사건도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이러한 지역 불균형은 결국 ‘의사 수 증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의사들은 자율적으로 개원지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기 때문에, 불리한 환경(인구 적음, 의료 수요 낮음, 의료사고 리스크 높음)의 지역은 기피 대상이 된다. 정부가 아무리 지역 의료를 살리자고 외쳐도, 의료인의 생존 조건이 보장되지 않으면 지역에는 남지 않는다. 결국 인센티브 제공, 공공의료 강화, 지역 전담 의사 양성 등 다각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반대로, ‘의료 과잉’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주제다. 도심의 일부 대형병원에서는 실제로 불필요한 검사나 과잉 진료가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예를 들어 감기 증상으로 내원했는데 CT를 찍거나, 단순한 위염에도 고가의 내시경 패키지를 권유하는 사례도 있다. 의료기관이 수익 중심으로 운영될 때, 진료의 질보다 양이 우선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환자에게 부담이 되고, 전체 건강보험 재정을 압박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또한 의료의 '상업화'도 의료 과잉의 대표적인 문제다. 고령 사회로 접어들며 건강검진, 미용의료, 웰빙 치료 등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의료 필요성’보다 ‘시장 논리’에 따른 공급이다. 특히 일부 미용 클리닉은 ‘의사 1인 + 10명 보조인력’ 구조로 돌아가며, 의료 질보다 수익 창출에 집중하는 경향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필수 의료는 인력과 자원이 부족해지고, 비필수 의료에 자원이 몰리는 불균형한 의료 생태계가 고착화된다.
의사 부족과 의료 과잉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동전 양면처럼 연결된 문제다. 의료 인력의 수급 불균형, 지역 간 격차, 의료의 상품화, 그리고 정책의 단기성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어디에, 어떤 분야로,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는 공공의료 의대 신설, 지역의사제, 필수 진료과 인센티브 강화 등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아직 현장과의 거리감은 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료가 ‘돈벌이’가 아니라 ‘공공재’로 존중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의료 인력이 자신이 맡은 분야에 자부심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균형이 이뤄진다. ‘의사가 부족한가, 과잉인가’라는 이분법보다는, 누가, 어디서, 어떤 가치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를 묻는 사회적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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