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접종은 공중보건의 핵심 기둥이지만, 종교적 신념과의 충돌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권 일부 지역에서는 백신에 포함된 성분(예: 젤라틴)이 할랄 기준을 위반한다는 이유로,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은 신의 섭리에 개입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예방접종을 거부해 왔다. 특히 COVID-19 팬데믹 기간 중에는, 백신이 신앙심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이나, 종말론적 해석을 동반한 반대 운동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갈등의 본질은 단지 신념의 차이에 있지 않다. 예방접종 정책이 국가 중심, 과학 우선의 일방적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점도 문제다. 종교는 단지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공동체적 질서이자, 문화적 정체성이다. 이런 정체성을 존중하지 않고 “비합리적”이라는 시각만으로 접근하면, 종교 공동체의 반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백신 자체’가 아니라, 백신을 대하는 태도와 소통 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예방접종의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종교는 예방접종의 강력한 우군이 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인도네시아의 울레마 협의회(MUI)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백신 성분을 심사하고, ‘할랄 인증 백신’을 승인함으로써 지역 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정부보다 종교 기관의 권고가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아프리카의 일부 기독교 커뮤니티에서는, 목회자와 사제가 직접 백신 접종에 참여하거나 교회에서 예방접종 캠페인을 주도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준 지혜의 산물로서 과학을 수용하자”는 해석을 바탕으로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시도했다. 실제로 이런 공동체에서는 예방접종률이 급격히 상승했고, 공공의료와 종교 사이의 신뢰도도 향상되었다. 종교는 단지 신념 체계가 아니라, 공공 신뢰 형성의 중요한 파트너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나 보건당국이 종교 공동체와 충돌할 때 가장 흔히 범하는 실수는 ‘설명하면 설득될 것이다’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신념은 정보로만 바뀌지 않는다.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종교 집단에게 데이터를 제시해도, 그것은 ‘신앙을 시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접근 방식은 설득이 아니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먼저 공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일부 유대 공동체가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을 거부했을 때, 단순히 백신 홍보 자료를 배포하는 대신, 지역 라비(유대교 지도자)를 초청하여 공동 토론회를 열고, 율법적 관점에서 예방접종을 해석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 접근은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신념의 틀 안에서 백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예방접종률을 유의미하게 높이는 데 기여했다. 대화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 해법이었다.
종교와 예방접종의 관계는 결국 “과학 vs 신앙”의 대립 구조가 아니다. 현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믿음 기반 공공보건(Faith-based Public Health)’**이다. 이는 단지 종교계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 수립 과정에서부터 종교 지도자들을 참여시키고, 문화적 감수성을 반영한 보건 전략을 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WHO는 2021년 이후 다양한 종교 단체와 MOU를 체결하며, ‘종교와 협력하는 보건 전략’을 수립해 나가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을 정책의 방해물이 아닌, 동반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백신 접종 캠페인을 설계할 때, 종교 행사와 일정이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거나, 종교적 의례에 적합한 백신 보관·투여 방식 등을 마련하는 식이다. 나아가, 종교 기관이 보건교육과 질병 예방의 거점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 결국 예방접종은 단지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의 문제다. 그 신뢰를 함께 구축할 파트너로 종교를 바라볼 때, 진정한 ‘공공보건의 혁신’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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